> 오피니언 > 독자기고
인향만리(人香萬里)
가평저널  |  gpjn2011@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11.09  11:15:4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가평군청 기획감사실장 이우인
다시 망설임 끝에 펜을 들었다.

눈도 침침하고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지만 나 자신 주마가편(走馬加鞭)하며 다시 글쓰기를 재촉해 본다.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추억들을 하나 둘 끄집어내어 거기에 생각을 더하여 보물처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열망이 이 글을 쓰게 된 동력이다. 인간의 수명이 128세까지 사는 것이 보편화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도 살아온 세월보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월이 더 많이 남은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가평읍장(촌장)을 역임한 적이 있다. 그 시절 주민들과 만남을 통해 나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삶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폭염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2016년 여름, 나의 작은 농장 일지원 평상에 걸터앉았다.

돌담 틈새를 들락거리던 다람쥐가 어느덧 내 주위를 맴돌고, 쓰르르 매미 울음소리 속에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촌장시절 경험을 회상한 것을 여기 글로 정리해 본다.

나는 가평읍장 시절 매주 화요일이면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마을로 직접 나가 이웃을 만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이 무렵 내가 만나는 이웃이란 기초생활수급자, 노인, 결손가정, 소년소녀가장 등 주로 어려운 여건의 주민들이다. 그러던 중 2015년 9월 9일 이른 아침, 대곡1리에 거주하는 이숙이라는 할머니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집에 도착하여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나는 집에 아무도 없는가 생각이 들었다. 담당 사회복지사에게 전화를 하니 할머니는 혼자 계시는데 누가 와도 좀처럼 만나려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그 할머니께 전화해 놓을 테니 다시 문을 노크해 보라고 하였다. 한참 후 문을 노크하니 그 할머니가 문을 열어줬다. “읍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 기피증이 있어서 문을 열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할머니는 대인기피증의 연유에 대해 서서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20년 전 사랑하는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남편은 한국 굴지의 은행장이셨어요.

남편은 저를 끔찍이도 아껴 주셨는데 남편이 급사하니 눈앞이 캄캄했어요.

우리 부부는 불행하게도 자식이 없어요.”하면서 사진을 보여주는데 젊은 날 은행장 부부의 화려함과 다정함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 후 저는 여고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정임이라는 동창생과 친자매처럼 의지하면서 살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정임이가 사업자금을 빌려달라고 해요. 저는 친구를 믿었기에 별 의심 없이 큰돈을 빌려주었지요.

친구는 계속해서 사업자금을 빌려달라고 했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나는 여러 차례 사업자금을 빌려주었지요. 그러나 친구 정숙이는 사업에 실패하고 자살해 버렸어요.

저는 모든 재산을 잃었고 살던 집까지 압류되면서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지요.” 가장 사랑했던 남편의 죽음, 친구의 불행, 그 많던 재산을 하루아침에 몽땅 잃어버린 것이 원인이 되어 우울증과 함께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하였다. 재산을 다 잃은 후 어느 날 꿈에 신선이 나타나 앞으로 지낼 길(吉)한 땅을 점지해 주셨는데 할머니는 남편을 그리며 굽이굽이 찾아온 곳이 가평읍 달전리였다고 하였다.

다행히 이숙 할머니께는 조카가 한명 있었는데 조카의 도움으로 2천만원 전세로 넥스빌 아파트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조카의 딸이 결혼을 해야 하는데 결혼자금이 부족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세금을 빼 주고 이 할머니는 대곡리에 있는 식당 이층의 조그만 방을 월세로 얻어 이사를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암까지 걸려 위암 투병 중에 있었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의 부엌과 방문은 매우 낡아 있었다. 방구석에는 매일 쓰고 있는 일기장이 책상 높이만큼 쌓여 있었고, 매일 불경을 필사한 화선지 또한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붓글씨로 써놓은 글들은 너무나 맑고 정갈하였다. 일기장의 내용들은 어떠했을까? 일기장에는 20년 전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사부곡(思夫曲)으로 가득했다. “저는 밥보다는 커피가 더 좋습니다. 수급비를 받으면 우선 커피를 사다 놓지요.”라고 말하였다. 정말 할머니는 커피를 벗 삼아 인생을 살아갈 정도로 커피애호가였다. 한 달 후 커피 한 봉지를 준비해 읍장으로는 두 번째 이숙 할머니를 방문했다. “할머니, 저 왔습니다.

읍장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문을 열면서 할머니는, “왜 또 오셨습니까. 바쁘실 텐데요.” 할머니는 배에 복수가 차올라서 벽에 베개를 받치고 비스듬히 기대서 나를 맞이했다. “할머니, 제가 병원에 모시고 갈까요?”
“병원에 다녀봤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어요.” 고종명(考終命)을 기다리며 병원에 가는 것을 사양하고 행복한 영면(永眠)을 기다리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내가 도와드릴 것이 없냐고 여쭤보자 할머니는 화선지 50장만 보내달라고 말씀하셨다. “읍장님, 나라에서 저를 돌봐주고 있어 무척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화선지 50장에 글을 다 쓰게 되면 제 생명은 다하겠지요.” 그러면서 그동안 쓴 일기와 가계부를 보여 주었다. 가계부를 한 번 들여다보았다.

이숙 할머니는 한 달에 50만원 정도 기초생활수급비를 받는다. 이 중 커피와 생활에 필요한 비용 35만원 정도를 쓰고 나머지 15만원 정도를 본인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쓰고 있었다. 가계부를 들여다 본 그날 하루 나의 머리는 띵하고 마음은 멍하였다.

한 마디로 감동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나왔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본인이 죽을 때 이 일기장을 모두 조카에게 줄 것이라고 하였다. 조카가 일기장을 책으로 출판하든 불에 태워 없애든 조카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하였다.

요즘 우리 사회는 소위 “갑”과 “을”로 나뉜다. 이숙 할머니 같은 분은 “갑”과 “을”은 커녕 “정”과 “병”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존재가 미약하지만, 그 분들도 사회공동체를 구성하고 사회를 지탱하며 묵묵히 살아오고 있었다.

문제를 제기하고 자기의 파이가 작다고 요란하게 외치는 “갑”과 “을”에게만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고 이숙 할머니와 같은 “정”과 “병”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등한시하는 우리 행정도 다시 한 번 자성의 기회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6년 가을, 이숙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조카가 장례를 잘 치렀다고 인사차 들렀다. 할머니는 아마도 천국의 사랑하는 남편 곁으로 갔으리라.

인향만리(人香萬里)라고 하였던가......
나는 할머니의 일기장을 몇 장 밖에 넘겨보지 못했지만 그 몇 장의 일기장 속에서 인간의 향기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평저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아름답게 수놓은 별을 찾다! 가족과 함께하는 ‘상색별밤도서관’
2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은 설미재가는 날!
3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은 설미재가는 날!
4
민주평통 가평군협의회, 2017 탈북청소년과 함께하는 통일이야기
5
법사랑위원회 가평군지부, 김장나눔 봉사
6
가평군, 정신건강증진 및 자살예방사업 발전대회 개최
7
제대군인의 NCS(New Challenge Success : 새로운 도전과 성공)를 응원하다!
8
군인을 위해 국가와 기업, 그리고 국민들이 함께 해주세요!
9
가평군, 2017년 농업기계 교육사업 우수기관 선정
10
[속보]설악면 이천리 부근 고속도로 차량 20중 추돌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연인2길 14 심천빌딩 3층 가평저널 | Tel 031-582-9743 | Fax 031-582-2129 | 사업자등록번호 : 132-81-75864
등록번호 경기 아 50160  | 등록일자 2010.11.12  | 발행일자 2010.12.15  | 발행인 최미경 |  편집인 황호덕 |  청소년보호책임자 황호덕
Copyright © 2013 가평저널.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pjn2011@naver.com
가평저널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